눈물 젖은 베이글: '런던 베이글 뮤지엄' 비극이 폭로한 4가지 불편한 진실

'감성'을 소비하기 위해 줄을 서는 우리에게 던져진 질문
‘오픈런’, ‘감성 핫플’. 우리 시대, 특히 2030 세대에게 이 키워드들은 하나의 소비 문화를 상징한다. 우리는 ‘런던 베이글 뮤지엄’ 같은 유행의 최전선에 있는 장소의 독특한 ‘감성’을 경험하기 위해 몇 시간씩 줄을 서는 수고를 기꺼이 감수했다. 그러나 그 화려한 인테리어와 먹음직스러운 베이글 이면에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어두운 그림자가 있었다. 바로 한 20대 청년 노동자의 비극적인 죽음이다. 이 사건은 단순히 안타까운 과로사로 치부될 일이 아니다. 이는 가시적인 성공에 대한 우리 사회의 병적인 집착이 어떻게 그것을 좇는 청년 세대 자신을 집어삼키는지, 그 끔찍한 민낯을 폭로하는 고발장이다.
첫 번째 진실: 창업주의 성공 신화는 '피로 쓴 에세이'였다
창업주는 미디어를 통해 끊임없이 자신의 성공 서사를 설파했다. 열정과 노력으로 트렌드를 선도하는 브랜드를 일구어냈다는 감각적인 이야기는 많은 이들의 부러움을 샀다. 그러나 이 사건은 그 화려한 포장지가 실은 노동 착취의 결과물을 미화한 것에 불과했음을 폭로했다. 사용자가 요구한 ‘거짓말 에세이’란 바로 이것이다. 그의 성공과 회사를 수천억 원대에 매각하며 거머쥔 막대한 부는, 한 청년의 목숨을 대가로 한 것이었다. 이것을 성공이라 부르는 것에 우리는 동의할 수 없다. 이것은 성공이 아니라 약탈의 기록이며, 우리는 이를 분명히 명명해야 한다.
"창업주의 성공 에세이, 잉크 대신 피로 쓰였다"
두 번째 진실: 법을 악용한 교묘한 통제 시스템, '쪼개기 계약'
이 기만적인 성공 서사가 어떻게 가능했는가? 그 비결은 법의 허점을 파고든 교묘하고 체계적인 통제 시스템에 있었다. 회사가 노동자를 착취하기 위해 사용한 핵심 수단은 바로 ‘쪼개기 계약’이었다. 1개월, 3개월, 7개월 단위의 초단기 근로계약을 반복하며 노동자들을 상시적인 고용불안 상태로 내몰았다. 이는 2년 이상 근무 시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하는 법망을 피하고 퇴직금 지급 의무를 회피하기 위한 얄팍한 수법을 넘어선다. 이는 노동자의 목줄을 쥔 채, 그들을 순응적인 부품으로 전락시키는 완벽한 통제 장치였다. CCTV를 통한 상시 감시와 시말서 강요 의혹까지 더해지면서, 이곳이 ‘19세기 공장’을 방불케 하는 인권 유린의 현장이었음을 드러낸다.
세 번째 진실: 숫자로 드러난 비극, 주 80시간과 21시간 연속 근무
이처럼 노동자를 일회용 부품으로 취급하는 시스템의 귀결은 예측 가능했다. 그것은 숫자로 증명되는, 한 인간의 영혼을 갈아 넣는 비극이었다. 유족과 동료들의 증언에 따르면 고인은 주당 80시간에 육박하는 살인적인 노동에 시달렸으며, 심지어 사망 닷새 전에는 21시간 연속 근무까지 해야 했다. 이는 노동력의 ‘활용’이 아닌 명백한 ‘소진’이었고, 한 인간에 대한 ‘인격 말살’ 행위였다. 더욱 공분하게 하는 것은 회사의 파렴치한 태도였다. 초기 대응에서 ‘주 80시간 근무는 사실이 아니다’라며 의혹을 부인하기에 급급했고, 한 임원은 유족에게 ‘양심적으로 행동하라’는 식의 2차 가해성 메시지까지 보냈다. 이는 죽음 앞에서도 최소한의 인간적 도리마저 내팽개친 파렴치한 집단임을 스스로 고백한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의 '오픈런'이 그의 '마지막'이었다"
네 번째 진실: 이제 소비자가 답할 차례이다
이 끔찍한 착취의 사슬을 끊어낼 마지막 열쇠는 소비자에게 있다. ‘런던 베이글 뮤지엄’에 대한 불매운동은 단순한 분노의 표출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으며 쌓아 올린 성공은 결코 용납될 수 없다’는 사회적 합의를 선언하는 가장 강력하고 이성적인 외침이다. 이는 시장에서 비윤리적인 행위자를 퇴출시키는 ‘시민적 위생’ 행위와 같다. 감성을 팔아 청년의 삶을 산 기업이 다시 노동자의 피눈물 위에서 사업을 벌이는 일을 막기 위해, 우리는 이 비극의 공범이 되기를 거부해야 한다. 우리의 선택이 제2, 제3의 비극을 막고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를 만드는 소중한 시작점이 될 수 있다.
당신의 소비는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런던 베이글 뮤지엄’ 사건은 단지 한 기업의 일탈이 아니다. 이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성공 지상주의와 그 이면의 노동 경시 풍조가 빚어낸 필연적인 비극이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우리가 열광하며 소비하는 그 ‘맛’과 ‘감성’이, 혹시 누군가의 피눈물 위에 세워진 것은 아닌지 말이다. 우리의 소비가 찬란한 감성이 아닌, 인간의 존엄성을 선택하는 명백한 증거가 되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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