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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스피싱, 은행 책임론이라는 '뜨거운 감자'

AI독립군 2025. 9. 18. 10:17

보이스피싱, 은행 책임론이라는 '뜨거운 감자':

-우리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게 되는가-

 

연간 피해액 1조 원. 이는 더 이상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닌, 우리 주변 누군가의 피눈물이 새겨진 처참한 현실의 숫자이다. 진화를 거듭하는 보이스피싱 범죄 앞에 개인의 주의력만 탓하기엔 그 수법이 너무나 교활하고 집요해졌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정부가피해자 자력 송금건에 대해서도 은행이 배상 책임을 지도록 하는 법제화를 추진하겠다고 나선 것은, 기존의 패러다임을 뒤흔드는 파격적인 조치임에 틀림없다. 이는 절망에 빠진 피해자들에게 한 줄기 빛이 될 수 있다는 기대와 동시에, 자칫 위험한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은 아닌가 하는 깊은 우려를 낳고 있다.

 

‘시스템의 실패를 인정하다: 책임의 무게, 개인에서 금융사로

정부 대책의 핵심 논리는 명확하다. 보이스피싱을 더 이상 개인의 실수가 아닌, 금융 시스템 전반의 구조적 리스크로 보겠다는 것이다. 아무리 개인이 주의를 기울여도 범죄 조직이 대포폰과 대포통장을 자유롭게 유통하고, 교묘한 심리전으로 피해자를 고립시키는 상황에서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금융 거래의 최종 관문인 은행에 더 큰 사회적 책임을 부여함으로써, 은행 스스로가 이상거래탐지시스템(FDS)을 고도화하고, 보다 적극적으로 고객 보호에 나서도록 유도하겠다는 전략이다.

 

실제로 영국의 사례는 이러한 접근이 가진 가능성을 보여준다. 자발적 송금 사기(APP Fraud)에 대해 은행의 강제 배상 제도를 도입한 이후, 많은 피해자가 실질적인 구제를 받았다. 이는 은행에 금전적 책임을 지우는 것이 단순한 비용 전가를 넘어, 범죄 예방 시스템 발전을 위한 가장 강력한 동기 부여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고객의 자산을 보호하는 것을 최우선 가치로 삼아야 할 은행이, 그동안고객 본인의 의사라는 방패 뒤에 숨어 소극적으로 대처해 온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시점이다. 

 

도덕적 해이와 통정 사기, 예견된 부작용

그러나 이 파격적인 대책의 이면에는도덕적 해이라는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어차피 은행이 물어줄 것이라는 인식이 확산된다면, 금융 소비자의 주의 수준이 전반적으로 하락할 위험을 배제할 수 없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피해자를 가장한 범죄, 통정 사기의 급증 가능성이다. 범죄자와 피해자가 공모하여 허위로 송금 피해를 신고하고 은행으로부터 배상금을 편취하려는 시도가 봇물처럼 터져 나올 수 있다.

 

은행의 입장에서는 억울한 측면이 있다. 은행은 단말기의 접속 정보나 거래 패턴은 분석할 수 있지만, 고객이 어떤 전화를 받고 어떤 심리적 압박 상태에서 송금 버튼을 누르는지까지는 알 길이 없다. 명백한 해킹이 아닌 이상, 거래의 자발성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결국 은행은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소액 송금에도 복잡한 추가 인증 절차를 요구하거나, 비대면 거래 한도를 대폭 축소하는 등의 방어적인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다. 이는 선량한 다수 고객의 금융 편의성을 심각하게 저해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이는돈 많은 은행이 해결하라는 식의 행정 편의주의적 발상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책임의 재분배, 그리고 사회적 합의를 향하여

결론적으로, 보이스피싱 문제의 해법은 은행에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것만으로는 완성될 수 없다. 이번 법제화 논의는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떻게 책임을 분담하고, 함께 시스템을 구축할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대타협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은행은 더 이상 수동적인 관찰자가 아닌, 금융 범죄 예방의 능동적인 주체로서 기술 개발과 투자에 전력을 다해야 한다. 정부와 수사기관은 대포폰, 대포통장 등 범죄의 뿌리가 되는 인프라를 발본색원하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조금의 불편함을 감수하더라도 더 안전한 금융 시스템을 만드는 데 동의하는 성숙한 합의에 이르러야 한다. 피해자의 눈물을 닦아주는 일은 중요하지만, 그 눈물이 더 이상 흐르지 않도록 댐을 쌓는 일은 우리 모두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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