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 2008년 겨울 호 게재)
세계 금융위기와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2부)
김기원 (방송통신대 경제학과 교수)
3. 이명박 정권의 경제정책
권력을 획득하려는 선거에서는 어떤 정치세력이든 만병통치약을 갖고 있는 듯 선전한다. 그러나 막상 그들이 권력의 자리에 오르면 갖가지 제약 조건 하에서 운신의 폭은 생각보다 좁아질 수밖에 없다. 이명박 정권이라고 다르지 않다. 자본가계급, 노동자계급, 시민사회가 미성숙했던 박정희시대와 같은 개발독재 체제에선 정권의 재량권이 상당히 넓었으나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물론 우리보다 더 짜여진 선진사회에 비해선 아직 국가권력의 영향력이 크지만 예전에 비할 바 아니다. 그리고 이는 사실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발전에 따른 자연스런 귀결이고, 비록 이명박 정권이 신공안정국을 조성해 시대를 역주행하는 경우에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이러한 체제적 제약조건에 더해 이명박 정권의 경제정책 집행에는 세계적 역사적 제약이 추가적으로 작용한다. 세계적으로는 유가 및 원자재가격 폭등이 2008년 상반기에 한국경제를 엄습했고 하반기에는 금융위기가 밀려왔다. 그리고 역사적으로는 지난 10년 동안의 정권 시기에 전개된 경제상황이 긍정적 또는 부정적 유산으로 주어져 있다. 남북경제협력의 진전, 구조조정과 양극화, 주택가격 폭등이 바로 거기에 해당한다. 이명박 정권이 수세에 몰리자 글로벌 상황이나 지난 정권 탓을 하는 것은 무책임한 자세이긴 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지는 않은 셈이다.
또한 정치적 지지기반 여부도 경제정책의 추진동력에 영향을 미친다. 노무현정권도 지지 세력이 갈라지고 지지율이 떨어지면서 제대로 된 경제정책을 밀고 나가지 못했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은 집권 초반부터 지지율이 급락했다. 이른바 강부자?고소영 인사나 친박세력과의 갈등이라든가 민심과 괴리된 쇠고기협상의 결과다. 한국은 개발독재체제에서 선진국체제로 나아가는 과도기에 놓여 있는데, 과도기는 낡은 것은 사라지고 있지만 새로운 것은 아직 안정적으로 자리잡지 않은 시기다. 여기선 모두가 불안해하며, 그에 따라 선거 때의 압도적 지지가 정권의 몇 가지 과오 속에 금방 실망의 폭발로 뒤바뀐다. 이렇게 지지기반이 취약해지면 정책이 어정쩡해지기 쉽다. 큰 변화를 이끌어 갈 추진력이 미약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상과 같은 제약조건 하에서 아직 정권통치의 전반부이기는 하지만 이명박 정권의 구체적인 경제정책은 어떻게 전개되었는가. 첫째로 성장정책을 검토해보자. 대선 과정에서 제시했던 이명박 정권의 성장정책을 집약적으로 표현한 것이 ‘747 공약’이었다. 매년 7%씩 성장해 10년 안에 1인당 국민소득 4만 불을 달성하고 세계 7위의 경제대국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큰 후유증 없이 매년 7%씩 성장하는 것도 무리지만, 매년 우리가 7%씩 성장하고 현재 경제규모 7위인 이탈리아가 성장을 중단하더라도 10년 사이에 우리가 이탈리아를 넘어서기 어렵다는 사실은 계산기를 두드려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이렇게 초보적인 계산조차 소홀히 한 공약인데다 정권도 더 이상 스스로를 기만할 수 없었던지 ‘747’ 정책은 기억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또 하나 이명박 정권의 성장정책을 대표한 것이 ‘대운하’였다. 그러나 물류를 개선한다는 명분으로 제기된 대운하사업은 건설업자에게는 이득이 되겠으나 환경을 파괴하고 물류개선 효과는 기대할 수 없다는 점이 드러나면서 747정책과 마찬가지 운명에 처해졌다. 그러자 장기비전을 잃어버린 대통령은 다소 생뚱맞게 ‘녹색성장론’을 들고 나왔다. 태양광, 풍력, 연료전지 등의 신?재생 에너지 분야를 대대적으로 키우겠다는 것인데 이 자체는 나쁠 게 없다. 다만 현재 태양광, 풍력 발전 분야의 수입의존도가 각각 77%, 97%인 상황에서 참여기업들이 원천기술 개발이나 해외시장 개척의 전망을 갖추지는 못한 채 정부의 발전차액지원금을 겨냥하고 있다는 비판도 있다. 그리고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쳐온 데다 유가의 급락세로 신?재생에너지의 경제성이 의문시되면서 애당초 진정성이 부족했던 녹색성장에 대한 정권의 열의는 식어가는 것 같다.
한편 이명박 정권은 각국의 보수정권이 일반적으로 취하는 성장정책인 감세정책을 제기했다. 소득세, 법인세, 상속증여세, 종합부동산세를 인하해 소비와 투자를 진작시키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혜택이 주로 부자와 대기업에 돌아가는 감세정책의 성장촉진 효과는 미미하다. 소비성향이 낮은 부유층의 가처분소득이 증대된들 내수가 별로 커지지 않으며, 이미 유보금을 잔뜩 쌓아두고 있는 대기업에 법인세를 인하한들 투자가 크게 늘 리 없다. 특히 세계금융위기와 국내경제 불안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개인이나 기업은 세금이 줄더라도 오히려 지출을 줄여 위험에 대비하는 쪽으로 행동할 것이다.
둘째로 분배정책은 어떠한가. 지난 정권이 좌파 분배주의 정책을 취했다고 비난하고 집권했으므로 당연히 분배정책에 대한 현 정권의 관심은 희박하다. 성장만 되면 자동적으로 분배문제는 해결된다고 하는 ‘성장만능주의’에 입각하고 있다 하겠다. 그래서 예산편성에서 복지부문의 지출은 현상유지 차원에 머무르고 있고, 부자와 대기업에 주로 혜택이 돌아가는 감세를 통해 사실상 분배를 악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주택가격 및 주가의 폭락이나 내수 위축으로 타격받는 중산층 및 하층서민에 대한 복지지출을 희생시키고라도 자신의 확실한 지지기반에 봉사하겠다는 뜻이리라.
이명박 정권은 IMF사태 이후 진행된 양극화의 현실 즉 이제는 성장과 분배의 연결고리가 약화되었기 때문에 독자적인 분배정책이 필요하다는 점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 듯싶다. 이렇게 분배개선을 위한 국가의 시장개입을 기피하므로 이들의 성장만능주의는 시장만능주의이기도 하다. 또한 현 정권이 내건 선진화는 그냥 1인당소득의 증대일 뿐이지, OECD 최하위권인 한국의 사회복지 지출수준을 높여 성장과 복지의 균형을 지향하겠다는 목표의식은 없는 셈이다.
다만 유가환급금을 지급한다든가, 이동통신사에게 요금인하를 요구한다든가, 은행에게 수수료 인하를 요구한다든가, 공공요금을 동결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정권이 서민생활에 관심을 갖는다는 인상을 주기 위한 전시행정에는 적극적이다. 제도의 개혁을 통해 서민들의 삶과 분배문제를 개선하는 쪽은 소홀히 하면서 일회성의 관치를 자주 동원하는 것이다. 이런 관치는 ‘대불공단의 전봇대 뽑기’처럼 실제론 쇼 이상의 의미가 별로 없는 경우가 태반이다. 이리해서 이명박 정권의 경제정책은 묘하게도 관치라는 개발독재와 시장만능주의가 샴쌍둥이처럼 붙어 있는 모습이다.
셋째로 위기 및 경기 대책을 살펴보자. 먼저 정권 초반기에 유가와 원자재 가격의 급등으로 국내물가 불안이 우려되고 있었다. 2007년의 소비자물가상승률이 2.5%였는데 현 정권 들어선 5% 정도로 높아진 것이다. 그런데 기획재정부 장관은 고환율을 부추기는 발언을 해서 물가불안을 심화시켰다. 또한 물가불안이 큰 이슈로 되자 1960~70년대 개발독재 식으로 물가단속을 하겠다고 나섰다. 이렇게 시장을 불안케 하고 윽박지르는 행태는 환율이 폭등하고 제2의 IMF사태 운운하는 상황이 벌어졌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외환딜러를 단속하겠다고 하고 기업들을 질타해 보유 달러를 풀게 하였다. 기껏해야 반짝 효과밖에 발휘하지 못하는 조치들을 대책이라고 내놓은 것이다. 그러다 마침내 다른 나라들의 금융위기 대책을 보고서야 뒤늦게 정부의 은행외채 지급보증이라는 특단의 방안을 내놓고, 간신히 한미 통화맞교환협정을 체결했다. 시장과 소통하고 시장을 조절하는 능력의 결핍을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경기 대책과 관련해선 금융 면에선 신용경색을 풀기 위해 은행에 유동성공급을 늘이려 한다. 그래서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인하하고 은행 등의 채권을 사주기로 했다. 이런 유동성 확대조치는 불가피하기는 하지만 장차 거품과 격심한 물가상승을 초래하지 않고 외환사정을 악화시키지 않도록 조절을 잘 할 수 있을지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재정 면에선 감세와 재정지출 확대를 추구하고 있다. 지지층 결속을 위한 부유층 감세를 경기대책으로 내세우는 건 억지며, 감세와 재정지출 확대를 동시추진하면 재정의 건전성이 악화된다. 특히 일단 감세조치를 취하면 나중에 되돌리기가 힘들다.
또한 건설경기 부양에도 초점을 맞추고 있다. 건설업 지출비중이 GDP의 20% 정도로 OECD국가 중 최상위권인 우리나라에서 건설경기 부양은 손쉬운 경기대책이다. 특히 건설업에선 정부가 직접 발주할 수 있는 물량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 하지만 한국의 과도한 건설업비중은 축소시켜 가야 한다. 또 한국에는 부동산투기라는 특수한 고려사항이 있다. 김대중 정권 기의 경기부양을 위한 부동산규제 완화가 이후 부동산 가격폭등의 요인이 되었던 쓰라린 체험을 잊어선 안 된다.
그런데 현 정권은 야금야금 규제를 완화해 부동산 경기 활성화란 이름하에 부동산투기에 다시 불을 붙이려 한다. 그리하여 부동산관련 세금규제의 완화는 물론이고 심지어 노무현 정권 하에서 간신히 주택가격 폭등을 멈추게 하는 결정적 역할을 했던 LTV와 DTI 규제마저 허물고 있다. 이런 규제완화는 당장의 경기부양 효과는 별로 없으면서 그 부작용은 시차를 갖고 나타난다. 투자촉진이라는 명분하에 추진하고 있는 수도권 규제완화도 지역불균형을 심화시킬 위험성이 크다.
나아가 정부는 일부 미분양 아파트를 직접 인수해줌으로써 건설업에 대출해준 저축은행의 위기를 모면하려는 것 같다. 그런데 이는 건설업체의 도덕적 해이를 조장하며, 건설업의 구조조정을 지연시키고, 부동산가격의 거품해소를 지연시킨다. 1990년대 일본에서 보듯이 거품해소가 지연될수록 경기회복도 지연된다. 정부는 건설업의 구조조정도 병행한다고 했지만, 은행이나 정권이나 부실을 표면화시키고 싶지 않은 판에 과연 그게 효율적으로 이루어질지 의문이다.
게다가 국민세금을 동원한 건설업 지원은 어려운 경제상황에서의 공평한 고통분담 원칙에도 어긋날 수 있다. 2009년 예산에 반영된 대폭적 사회간접자본 확충도 경제성을 무시한 낭비사업이 되지 않을지 의문이다. 물적 유형물 대신에 인적 투자와 사회보장지출을 늘리는 게 지식정보화시대에 어울리는 경기대책일 텐데, 토건업 문화에 물든 대통령과 장관이 사고를 전환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실 올바른 위기대책은 경제구조의 선진화로 연결된다. 보통 때라면 상상하기 힘든 제도변화가 위기에서 가능해질 수 있는 것이다. 부자에 대한 증세를 통해 사회적 안전망을 확충하면 그게 바로 소비지출을 늘리는 경기대책이며 동시에 복지국가를 구축하는 길이다. 또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문제가 경기침체기에 더욱 두드러지고, 그 해결을 위한 사회적 압력이 커질 것이다. 이는 유연안정성(고용의 유연성과 생활의 안정성)이라는 덴마크식 선진모델이 도입될 기회로 작용할 수 있다. 하지만 개발독재와 시장만능주의에 사로잡힌 이명박 정권에게는 기대난망이리라.
넷째로 재벌 및 금융정책은 어떠한가. 대통령은 친기업(business-friendly)을 외치며 재벌에 대한 각종 규제를 완화하고 있다. 출자총액제한제도를 폐지하고 지주회사와 하도급 관련규제를 허물어트려 전경련의 오랜 요구를 수용하려 한다. 그런데 이런 규제완화의 명분은 투자활성화다. 하지만 출자총액제한제도와 같은 것들은 재벌기업의 투자를 저해하는 게 아니라 재벌총수의 황제경영과 선단문어발경영을 제약하는 규제다. 그리고 실제로 투자부진은 재벌보다 중소기업에서 심각하다. 그런데도 총수의 부패와 무능을 견제하고 대기업-중소기업간 공정거래를 요구하는 최소한의 장치를 허구의 명분으로 깔아뭉개려는 것이다. 시장을 강조하는 듯 하지만 사실은 시장의 발전에 배치되는 개발독재 시대의 재벌체제로 역주행하는 모습이다. 그리고 이는 중소기업에 일시적으로 자금지원을 늘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구조적인 중소기업 발전정책을 무시하는 것이다.
금융정책에서는 금산분리(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분리) 완화를 통해 재벌의 금융지배를 강화시키려 한다. 보험사나 증권사와 같은 금융기관은 이미 재벌이 거느리고 있으므로 실제 쟁점은 은산분리(산업자본의 은행지배 차단) 문제다. 이명박 정권은 산업자본의 은행지분 보유한도를 높여주고 또한 산업자본이 투입된 사모투자전문회사(PEF: private equity fund)의 은행소유를 확대시키려는 것이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 은행을 외국자본에게 넘겨줘야 한다는 걸 명분으로 삼는다.
하지만 표범을 피하려고 호랑이를 찾아서는 곤란하다. 은행을 재벌에게 넘기면 은행이 사금고화 되고 산업자본과 금융자본 사이의 견제와 균형이 무너진다. 이번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보았듯이 은행경영이 잘못되면 경제전체가 흔들리는 시스템 리스크가 발생한다. 더구나 한국의 재벌은 아직도 경영구조가 전근대성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독립적 금융자본을 육성하는 게 정도다. 그게 당장 힘들다면 현재 국유인 은행들에 대해선 소유구조는 일단 그대로 두고 지배구조를 개혁하는 쪽으로 나가야 한다.
다섯째로 기타 정책들을 검토해보자. 노동정책과 관련해선 한국노총과는 협의관계를 유지하면서 민주노총에겐 적대적 자세를 취한다. 민주노총 고위간부를 구속하고 전교조를 압박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정부와 노동계와의 한판 큰 싸움은 아직 벌어지고 있지 않다. 노사관계의 뚜렷한 제도적 변화방향도 드러나지 않았다. 기껏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문제를 근본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계약직의 허용기간을 4년으로 연장한다든가 하는 미봉조치만 선보이고 있다. 근래 노동쟁의의 주된 사업장이 대규모 사업장에서 비정규직 관련 사업장으로 바뀌었고, 또한 정권의 지지율 저하와 금융위기 발발로 결전의 시기를 정권이 미루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개방정책에선 지난 정권의 한미FTA 체결정책을 이어받는 데서 더 나아가 쇠고기협상을 무리하게 추진했다. 그리하여 검역주권까지 포기한 그 졸속성과 굴욕성으로 인해 정권은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반면에 남북한 사이의 개방정책에서는 실용주의를 내걸었지만 수구파의 냉전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해 남북경제협력을 침체시키고 있다. 중소기업의 애로 탈출구로 개성공단 같은 대북사업이 작용하고 있는 판에, 이를 막아선 이명박 정권은 반실용적 반기업적 자세를 보이고 있는 셈이다.
공공기관과 관련해선 통폐합, 기능조정, 민영화를 중심으로 한 방안을 3차에 걸쳐 내놓았다. 한때는 물도 민영화한다는 등 과격한 민영화방안까지 떠돌았으나 촛불시위와 정권의 지지율 저하로 인해 위험스런 방안들은 일단 자제하고 있는 듯싶다. 때문에 보수 세력들로부턴 어정쩡하다고 비판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인천공항공사의 민영화 등 조금씩 민영화를 추진하고 있기는 하다. 공공기관의 비효율도 바로잡아야 하고 민영화가 무조건 나쁜 것도 아니지만 재벌이나 외국자본에게 넘기게 되면 국가적으로 별 도움이 안 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공공기관의 대표에 대해 법적 임기를 무시하고 전리품 나누듯이 갈아치웠으므로 지배구조가 개악될 위험성도 증대된 형편이다. 공공기관의 정권 눈치 살피기가 더 심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4. 맺음말
시장경제는 효율성과 불안정성이라는 두 개의 얼굴을 갖고 있다. 이는 동전의 양면과 같아 한쪽만 취할 수 없다. 금번의 글로벌 위기도 주택거래의 효율성을 증대시키는 가운데 불안정성이 심화되어 폭발한 것이다. 이런 모순을 원천적으로 제거할 수는 없지만 조절할 수는 있는 게 자본주의국가다. 그래서 각국은 위기수습에 나서 은행의 부분 국유화라는 특단의 조치까지 동원했으며 초유의 국제적 공조체제를 갖추기까지 했다. 다만 금융위기를 일단 진정시키더라도 실물경제의 침체가 뒤따를 것이므로 세계경제가 언제 회복궤도에 올라설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이런 과정에서 금융자본의 폭주를 조장한 시스템이나 시장만능주의 사조에 부분적 손질이 가해질 것이다. 미국식 투자은행 모델의 문제점이 드러나면서 규제체계도 재정비될 수밖에 없으며, 가계의 과잉부채도 조정될 것이다. 미국에선 이참에 새로운 뉴딜(a new New Deal)로 의료보험 등 사회안전망에 대한 근본적 개혁을 통해 미국식 자본주의가 변모할 조짐도 보인다. 그리고 장차 미국 달러의 세계화폐 지위가 흔들리면서 글로벌 금융체제가 바뀌어갈지도 모르겠다.
한국경제는 한편으로 글로벌 위기의 여파에 휩쓸리고 다른 한편으로 부동산 등 내부적 문제점이 터져 나오면서 내우외환의 어려움에 처해 있다. IMF사태 이후 전개된 양극화가 더욱 심화될 가능성이 크다. 하층서민은 물론 중산층에 대해서도 심대한 타격이 가해질 전망이다. 그런데 ‘경제 살리기’를 내걸고 집권한 이명박 정권은 갈팡질팡하면서 시장과 국민의 신뢰를 상실하고 있다. 성장정책, 분배정책, 위기 및 경기 대책, 재벌 및 금융정책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기대보다는 우려가 크다.
위기 상황에서는 고통을 분담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어떻게 공평하게 고통을 분담하는가와 고통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경제구조를 선진화하는가이다. 개발독재체제에서 선진사회로 나아가는 과도기에 처한 우리 상황에선 개발독재, 구자유주의, 시장만능주의, 복지주의가 각축을 벌이고 있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은 개발독재와 시장만능주의에 경도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 결과 위기극복이라는 당면의 과제도 선진화라는 구조적 과제도 제대로 처리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
이렇게 된 까닭은 우리 사회에서 한편으로 관료통치의 타성이 작용하면서 재벌기업 및 재벌총수가 독점적 지위 유지에 집착하고 있고, 다른 한편으론 보수적 주류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를 경시하고 성장과 기업에 대한 우상숭배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이를 바로잡고 구자유주의와 복지주의를 강화함으로써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고도화’할 세력이 존재하느냐가 위기극복과 바람직한 선진화의 관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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