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와 언론의 전쟁, 왜 '소송'에서 '기술 규격'으로 무대가 바뀌었나?

AI가 답을 주는 시대, 사라지는 저널리즘의 대가
오늘날 독자들은 생성형 AI와 스마트 검색을 통해 뉴스의 핵심 요약을 몇 초 만에 확인하는 편리한 일상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이용자가 누리는 이 매끄러운 경험 뒤편에는 취재 현장의 정당한 권리 침해와 무보상 노동이라는 엄중한 경제적 불균형이 자리 잡고 있다. 대다수의 거대언어모델(LLM)은 인간이 생산한 고품질 저널리즘을 원재료로 삼아 구축되지만, 정작 원천 데이터를 제공한 뉴스룸은 적절한 라이선스 계약이나 정산 절차 없이 자산을 무단으로 출탈당하고 있다.
이러한 무단 스크래핑과 저작권 침해에 조직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2026년 2월 영국 매체들을 중심으로 출범한 'SPUR(출판사 이용권 표준, Standards for Publisher Usage Rights)' 연합이 글로벌 미디어 지형의 판도를 뒤흔들고 있다. 최근 SPUR는 뉴욕타임스(NYT), 디 애틀랜틱(The Atlantic), 디 옵저버(The Observer),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 등 40여 개 주요 매체를 전격 회원사로 맞이했다. 이로써 전 세계 20여 개국, 80개 언론·출판사가 결집한 거대한 국제 연대체가 구성되었으며, 미디어 산업의 대(對) AI 전략은 전례 없는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싸움의 무대가 '법정'에서 '규격'으로 옮겨가고 있다
그동안 언론사들은 빅테크 기업을 상대로 개별적인 저작권 침해 소송을 제기하거나 단독 라이선스 협상을 벌여왔다. 그러나 사후적 사법 구제(Ex-post Legal Remedy) 방식은 막대한 법률 비용과 장기간의 소송 지연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개별 매체에 수긍하기 어려운 미미한 보상만을 안겨준 채 법적 불확실성을 키워왔다. 고립된 개별전으로는 플랫폼의 거대한 자본과 기술적 장벽을 넘을 수 없음을 깨달은 미디어 산업은, 이제 사전적 기술 규격(Ex-ante Technical Standards)을 정립하여 '라이선싱'을 시장의 기본값(Default)으로 이식하는 집단적 집단 대응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SPUR가 제시한 실무 핵심 체계는 바로 '콘텐츠 텔레메트리 표준(Content Telemetry Standard)'이다. 이는 AI 연구소와 테크 기업이 어떤 미디어 데이터를 모델 학습에 활용했는지 데이터 파이프라인 단계에서 정확히 기록하고, 이를 언론사에 의무적으로 보고하도록 규정하는 기술 규격이다. SPUR는 이 프레임워크가 실무 현장에 즉각 적용될 수 있도록 전용 기술 도구를 개발하고 주요 산업 파트너들과 프레임워크 이행을 추진하고 있다.
SPUR의 대변인 데이비드 버틀(David Buttle)은 개별 소송의 한계와 단합된 기술 전선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단언했다.
"지난 몇 년간 미디어 출판사들은 얼마 되지 않는 보상을 위해 고립된 싸움을 벌여왔다. 이제 단합되지 않은 전선으로는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지금이야말로 연합이 필요한 때다."
과거 신용카드 결제 네트워크나 음원 스트리밍 정산 체계가 시장을 지배했듯, 산업의 주도권은 개별 계약 금액이라는 일회성 가격 협상이 아닌 '기본 조건(Default Terms)과 실무 규격을 누가 제정하는가'에서 결정된다. 데이터 파이프라인 내에 추적 및 보고 규격이 표준으로 정착되면, 이는 곧 모든 데이터 거래의 불가피한 출발점이 된다. 법정을 넘어 '기술 규격'을 손에 쥐는 쪽이 향후 데이터 경제의 주도권을 쥐게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어 뉴스의 역설 - 자산 가치는 높은데 '실무 규칙'이 없다
한국 미디어 시장 역시 글로벌 파동의 중심에 서 있다. 이미 국내 주요 신문사와 방송사 등 언론 매체들은 포털 및 AI 기업들이 뉴스 콘텐츠를 사전 동의 없이 AI 모델 학습에 무단 사용한 점을 문제 삼으며 법적 대응에 나섰다. 개별 매체의 분쟁은 이미 현실화되었으나, 이를 산업 전체의 정당한 거래 규칙으로 승화시키는 제도적 기틀은 여전히 부재하다.
특히 한국어처럼 글로벌 시장 대비 사용자 권역이 제한적인 언어 환경일수록, 정제되고 검증된 뉴스 데이터는 AI 모델의 성능과 환각(Hallucination) 방지를 좌우하는 고품질 희소 자원으로 기능한다. 방대한 비정형 데이터의 질적 한계가 뚜렷한 언어권에서 취재와 편집을 거친 한국어 뉴스는 가치가 매우 높은 핵심 자산이다.
그러나 국내 시장의 법적·제도적 현실은 이 같은 자산 가치를 전혀 받쳐주지 못하고 있다. 2026년 시행된 인공지능 기본법은 산업 진흥과 안전성 확보라는 거시적 틀을 제공하지만, 정작 AI 기업의 학습 데이터 출처 기록이나 대가 정산 같은 세부 '실무 규격'을 전혀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현행 저작권법상 AI 학습 목적 이용의 허용 범위가 여전히 법적 '해석의 영역'에 남겨져 있어, 법적 명확성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다.
결국 정보 비대칭 구조 속에서 언론사는 자사의 지적 자산이 어떤 AI 모델에 어떻게 학습되었는지조차 추적할 수 없는 심각한 깜깜이 상태에 놓여 있다. 기술적 기록(Telemetry)이라는 기본 원칙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어떠한 저작권법 개정이나 정당한 대가 협상도 실효성을 거두기 어렵다.

'언론 vs AI'의 대립을 넘어 - 선택권과 지속 가능한 데이터 공급망
과거 언론계 일각에서는 저널리즘 보호의 유일한 길을 뉴스룸 내 AI 기술의 전면 배척에서 찾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 블룸버그(Bloomberg)나 로이터(Reuters) 같은 글로벌 레거시 미디어들은 기사 상단 AI 요약 서비스를 도입하는 등 독자 경험을 극대화하기 위해 AI 기술을 뉴스룸의 핵심 도구로 적극 수용하고 있다.
2023년 OpenAI와 마이크로소프트를 상대로 저작권 침해 소송을 제기하며 가장 강경한 법적 투쟁을 이끌었던 뉴욕타임스(NYT) 역시 기술의 무조건적 거부가 아닌 공존의 규격을 강조한다. NYT의 전략적 파트너십 담당 수석부사장 레베카 그로스만-코엔(Rebecca Grossman-Cohen)은 고품질 저널리즘이 건전한 민주주의뿐만 아니라 AI 제품의 정상적 작동을 위한 필수 요소임을 지적하며, 빅테크 플랫폼에 의한 일방적 표준 제정을 경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지식재산권 보호와 기술적 발전은 함께 존재할 수 있으며, 반드시 공존해야 한다."
문제의 본질은 AI 기술 도입 자체에 대한 찬반이 아니다. 핵심은 "뉴스룸이 자사 콘텐츠의 이용 여부와 활용 범위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통제권(선택권)"을 지니고 있느냐이다. 자율적 선택권이 보장될 때 비로소 뉴스룸은 AI 기술의 혜택을 향유하는 동시에 정당한 라이선싱 거래를 성립시킬 수 있다.
나아가 시장 설계 관점에서는 자본력이 약한 초기 AI 스타트업의 데이터 접근성을 과도하게 봉쇄하지 않으면서도, 원천 데이터 생산자인 뉴스룸의 취재 기반을 보장하는 '지속 가능한 데이터 공급망'을 구축해야 한다. 원천 데이터 공급처가 고사하면 AI 생태계 역시 저품질 데이터의 늪에 빠지게 되므로, 양자의 관계는 일방적 수탈이 아닌 지속 가능한 동반자 관계로 재설계되어야 한다.
한국형 SPUR 구축을 위한 3가지 전략적 제언
한국 미디어 및 AI 생태계가 지속 가능한 데이터 경제의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SPUR 연합의 선제적 프레임워크를 참조하여 다음과 같은 전략적 3대 과제를 실행해야 한다.
- 업종을 넘어서는 연대의 틀 구축 신문, 방송, 통신사, 온라인 매체 등 매체별 이해관계를 넘어 언론계 전체를 아우르는 공동 협상 창구와 공통 라이선싱 표준을 마련해야 한다. 파편화된 개별 대응을 지양하고 단일화된 연대 전선을 구축해야만 거대 플랫폼 및 AI 기업을 상대로 대등한 가격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다.
- '기록 의무(Telemetry)'의 제도화 AI 기업이 모델 학습에 활용한 콘텐츠의 출처를 객관적으로 기록하고 보고하는 표준 체계를 제도적으로 의무화해야 한다. 정부는 사적 계약에 직접 개입하기보다, 투명한 기록과 보고 체계가 시장에서 작동할 수 있도록 표준화 및 인증 프레임워크를 정립하는 중립적 조정자 역할에 집중해야 한다.
- AI 스타트업을 위한 완충장치 마련 초기 AI 기업의 혁신 동력을 저해하지 않도록 기업 규모 및 매출 기준에 따른 단계적 대가 정산 체계를 구축하고 공공 데이터 풀(Pool)을 조성해야 한다. 테크 기업 역시 데이터 대가를 단순한 비용 지출이 아닌, 고품질 원재료를 안정적으로 수급하기 위한 필수적 투자로 인식하는 시각의 전환이 시급하다.

앞으로 10년의 데이터 경제를 좌우할 선택
세계 미디어 산업이 지루한 소송전에서 SPUR 중심의 '기술 규격' 제정으로 전선을 이동하는 현상은, 단순한 저작권 분쟁을 넘어 데이터 경제의 주도권 재편을 의미한다. 지금 정립되는 데이터 기록 규격과 라이선싱 기본값(Default)은 향후 10년 이상 지속될 디지털 콘텐츠 생태계의 판도를 결정짓게 될 것이다.
빅테크 플랫폼이 일방적으로 구획한 규칙에 수동적으로 끌려가거나 수사적인 반대만을 되풀이해서는 미디어의 미래를 담보할 수 없다. 언론과 AI 산업이 상생할 수 있는 기술적·제도적 표준을 선제적으로 제시하고 협상 테이블의 주도권을 쥐어야 한다.
뉴스는 단순한 AI의 일회성 연료로 소비될 것인가, 아니면 정당한 가치를 인정받는 지속 가능한 자산으로 남을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지금 우리가 어떤 기술 표준과 전략적 선택을 내리느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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